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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야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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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야류의 소개

역사

수영야류의 소개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은 원래 좌수영(左水營)의 준말로 조선시대 선조 때에 현재의 수영동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 水軍節度使營)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폐영이 된 뒤에도 오늘날까지 관아의 명칭을 줄여서 그대로 부르고 있다. 현재 수영이라 할 때 좁게는 행정구역상으로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만 가리키기도 하고, 넓게는 수영구, 즉 수영동을 중심으로 수영구의 망미동, 민락동, 광안동 일대를 두루 지칭하기도 한다.

수영지역의 북쪽은 장산(萇山)과 황령산(荒嶺山)이 있어 북풍을 막아 주고 그 사이에 사천(絲川, 현재의 수영강)이 남쪽을 향하여 수영만으로 흐르면서 수영평야를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이다. 이런 지형은 취락을 이루기에 알맞은 곳이다. 더욱이 수영평야가 비옥하고 바닷물과 민물이 합수하는 수영만은 어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농업은 물론 수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좋은 자연적인 조건 때문에 이 일대에 취락을 이루어 수영평야에 농사를 짓고 수영만에 고기잡이를 하면서 사람들이 살았다. 수영사람들은 수영동뿐만 아니라 황령산 아래 광안리, 망미동, 남천동 일대에 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이런 생활여건에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 농경(農耕)에 관계된 의식(儀式)을 행하고 이에 따른 놀이를 하여 왔다.

수영지역이 번화한 군영지대로 된 것은 조선시대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이전해 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은 원래 부산포(戡蠻夷浦)에 있었는데, 태종 때에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겼다가 선조 25년(1592)에 동래 남촌(南村, 현 수영동)으로 옮겼다. 그 뒤 수영진은, 인조 13년(1635)에 홍수로 사천(絲川)이 범람하고 강구가 매몰되어 감만이포(戡蠻夷浦)로 이전되었으나 그곳이 왜관(倭館)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것이 염려되어 효종 3년(1652)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그 이후 고종 32년(1895) 군제 개혁으로 폐영되기까지 244년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이곳 수영동에 존속하여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수영지역의 지명이 동래부 남촌면(南村面)이었는데, 숭정리(崇亭里, 현 망미동), 북문외리(北門外里, 현 수영동), 남문외리(南門外里, 현 수영동), 동부리(東部里, 현 수영동), 서부리(西部里, 현 수영동), 감포리(甘浦里, 수영 백산 아래 바닷가) 축산리(丑山里, 현 광안동) 포리리(包伊里, 수영교 근방), 칠포리(漆浦里, 수영 백산 아래 바닷가), 대연리(大淵里, 현 대연동), 석포리(石浦里, 현 대연4동), 남천리(南川里, 현 남천동), 분포리(盆浦里, 현 용호동), 우암리(牛岩里, 현 우암동), 감만리(戡蠻里, 현 감만동), 용당리(龍堂里, 현 용당동) 등 16 이(里)로 그 영역이 부산의 동남단인 수영강 연안으로부터 서쪽은 우암동에 이르는 연안 일대와 북쪽의 망미동까지 포괄하여서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현재의 부산시 수영구와 남구 행정구역을 합한 것과 거의 같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는 경상좌수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 수영동이라는 행정 동명은 경상좌수영이 자라잡고 있던 과거 수영성 안의 동부리와 서부리, 그리고 성 밖의 북문외리와 남문외리의 영역을 가리키고 있다. 수영동을 중심으로 수영구의 망미동, 민락동, 광안동 일대를 두루 지칭하여 수영이라고 말할 경우는 1950년대의 부산시 동래구 수영출장소 관할구역, 그리고 오늘날 부산광역시 수영구와 그 영역이 거의 같다.

수영야류의 탈놀음은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 즉 오늘날 수영동 사람들이 놀고, 탈놀음의 놀이꾼들이 이 마을들의 마을 굿 당을 돌며 고사를 올린다. 놀이와 한마당 춤 놀이에는 동래군 남면 지역 사람들이 다 참여하였고, 수영출장소가 해운대출장소로 분할되기 전에는 멀리 해운대, 재송동 사람들까지 놀이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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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수영야류의 소개 학계에서 탈을 쓰고 노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탈놀이, 탈놀음, 탈춤, 탈춤놀이 등으로 혼용하고 있지만 개념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가려 써야 할 것이다. 탈을 쓰고 행하는 우리의 모든 연행에는 놀이성, 연극성, 무용성이 다 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강한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농악대의 잡색놀이꾼이 탈을 쓰고 노는 따위는 춤도 추고 연기적인 행위를 하지만 그것보다 놀이성이 강하여 탈놀이(假面戱)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처용무는 잡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처용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이므로 무용성이 강하여 탈춤(假面舞)이라고 한다. 한편 양주별산대, 봉산탈춤, 오광대 같은 것은 춤도 추고 흥겹게 놀지만 집약적인 사건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연극성이 두드러지므로 탈놀음(假面劇)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모든 탈놀음에는 제의성과 연극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강한가에 따라 굿 탈놀음(祭儀的假面劇)과 극 탈놀음(演劇的假面劇)으로 갈래지을 수 있다. 굿 탈놀음은 제의가 행해지는 층위에 따라서 나라 굿 탈놀음(國祭假面劇), 고을 굿 탈놀음(邑祭假面劇), 마을 굿 탈놀음(洞祭假面劇)으로 나눌 수 있다. 극 탈놀음은 놀이 주체가 유랑하는 전문적인 연예집단이 공연하는가, 그 지역의 토착주민이 세시적 행사의 하나로 놀이하는가에 따라 떠돌이 극 탈놀음(떠돌이탈놀음)과 토박이 극 탈놀음(토박이탈놀음)으로 나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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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수영야류의 소개 물 좋고 땅 좋은 수영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정초부터 중순께까지 지신밟기를 하여 들놀음의 일부 경비를 조달하고, 한편 탈을 신성한 장소에서 만든 뒤 탈을 모시고 탈 제를 지낸다. 그리고 보름날 낮에 탈놀음꾼들이 동제당과 고을의 대표적인 우물에 들러 고사를 지낸 후 해거름에 많은 고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무놀이를 하는 가장행렬인 길놀이를 하면서 고을 가운데 시장터인 놀이마당에 도착하면 긴 장대에 매단 수많은 등불 아래서 고을 사람들은 물론 원근의 마을 사람들까지 끼어들어 허튼 덧배기 춤 을 추며 함께 열광하는 한마당 춤 놀이를 밤중까지 신명나게 놀다가 탈놀음을 연희하고, 마지막으로 썼던 탈과 도구들을 모아 태우면서 고사를 올린다. 이런 모든 놀이과정을 합하여 들놀음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 탈놀음 중에서 들놀음만큼 그 가치에 비하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 들놀음을 오광대의 아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변하는 시대의 여건에 따라 탈놀음만 공연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체의 놀이과정을 살피지 않고, 탈놀음만 주시하였기 때문이다. 탈놀음만 보면 오광대와 비슷하나, 전체 놀이과정을 보면 하회별신굿놀음과 친연성이 더 많다. 들놀음은 연극으로 발달한 것이지만, 마을 굿의 유산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굿 탈놀음(祭儀的假面劇)과 극탈놀음(演劇的假面劇)의 중간 단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놀음이 자리매김하는 한국 연극사의 위상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이 들놀음의 소위 원조가 「수영야류」다. 이런「수영야류」실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수영야류에서는 일련의 많은 놀이과정을 세시적 행사로 행하므로 탈놀음은 4 과장만 놀이한다. 양반과장은 험상궂고 힘이 센, 젊은 말뚝이가 향락적이면서 허망한 권위를 내세우는 양반에게 대들며 풍자한다. 영남지방의 탈놀음에 양반풍자가 강하다고 하나 대체로 양반을 빗대어 욕하고 말을 돌려 바보로 만드는 것에 그치는데, 수영야류에서는 마지막에 양반의 어머니와 통정했다고 하여 양반집안의 근원적인 부도덕성을 폭로하여 양반들 스스로 집안이 망했다고 자탄한다. 이어서 영노과장에서는 영노라는 상상의 동물이 등장하여 위험을 모면하려고 비열하게 굴다가 참 양반이라고 마지막 위선과 위세를 내세우는 양반을, 양반답지 않는 양반이므로 잡아먹어 버린다. 수영야류에서는 이렇게 극심한 양반 풍자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할미 · 영감과장에서는 향유 층과 같은 계층인 가난한 영감이 첩질을 하면서 아내인 할미를 구박하는 남성횡포를 부리다가 본처를 죽여 오히려 처량한 신세가 된다. 이것은 바로 방탕하다가 패가망신한다는 민중의 자기반성적인 주제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서운 사자가 나타나 악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춤을 추는데, 사자의 힘을 더 돋보이고 재미나게 하기 위하여 맹수인 범을 잡아먹는 극적 표현을 한다. 이런 대립과 갈등을 놀이꾼은 재치 있는 재담과 흥겨운 가무와 웃음으로 표현하고 구경꾼은 흥취와 웃음으로 즐긴다.

당대 현실 문제를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놀이를 해마다 세시적 행사로 반복하여 문제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민중의식을 성장시키고, 갈등과 불만을 웃음으로 발산하여 답답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을 주고 새로운 기분으로 생활하려는 민중의 건강한 문화적인 장치가 「수영야류」다. 수영사람들이 변화하지 않은 일상의 생활에서 꿈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나가고자 「수영야류」를 놀았던 것이다. 대동놀이로서 「수영야류」가 지닌 포용성, 지역공동체의식, 그리고 풍자극으로서 탈놀음에 깃든 존재론적인 사고,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기질, 건강한 생명 우위의 사상 등은 우리 민중의 미덕이다. 그러므로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수영야류」는 바로 대표적인 우리 민중문화유산이요, 살아있는 민족문화라고 하겠다.

「수영야류」는 수영사람들에 의한, 수영사람들의 것이다. 「수영야류」가 수영사람들의 손으로 현대 도시사회에서도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온전히 전승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