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에서 농촌이었던 지역이 도시화되고 현대화됨에 따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었던 농사는 자연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수영 농청놀이를 재현함으로써 풀베기, 논갈기, 볍씨 뿌리기, 모찌기, 모춤 나르기, 보리타작, 논메기 등을 현장에서 처럼 볼 수 있게 되었고, 여자들도 이에 참여하여 모찌기, 모심기를 거드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보리타작 하는 모습도 보여 주고, 그리고 농사에 쓰이는 각종 농기구, 이를테면 쟁기, 써레, 가래를 비롯한 지게, 호미, 삽, 갈퀴, 도리깨, 풍석, 고무래와 비올 때 입는 짚으로 만든 우장, 잡사리와 같은 잊혀져가는 농기구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수영농청놀이의 특징이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농경의 풍속이 변천함에 따라 재래의 민요는 거의 인멸되고 있고, 농촌이 도시화함에 따라 오랜 세월동안 지탱되어 오던 농촌공동체의 붕괴와 더불어 민요는 물론, 농경의 풍속마저 급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완전히 도시화된 수영의 한 복판에서 영농의 전 과정과 농청 농요가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놀이는 수영 지역의 남녀 농부들이 예전의 농사짓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그 당시의 협업던체였던 농청이란 기구의 구성과 농청 조직원들의 역할 담당을 그대로 재현시킴으로써 귀중한 우리의 농경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시킨 점도 의의가 있다.
우리 것이라면 무조건 폄하하고, 무가치한 것으로만 여기는 이상한 사조가 팽배한 현실을 주고 보더라도 농요를 발굴하여 보존,계승한다는 것은 민족문화 전승에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수영농청놀이의 발굴과 전승은 농사에 관한 민속적 유산의 계승이며, 농요는 농청 조직원들이 고된 작업 때에 부르던 땀의 표현이니만치 이러한 민요의 가사와 곡을 후세에 전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이 놀이는 지역의 주민인 태말준, 정대윤, 태덕수 제씨 등이 옛 농청에서 일하는 것을 직접 보아 왔기에 그 모습을 그대로 생생하게 발굴할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한 가치성이 인정되어 1972년 2월 18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 수영농청놀이로 지정을 받게 된 것이다.
면적 10㎢ 에 불과한 오늘날의 수영구에 농토가 얼마나 있었겠느냐고 묻는다면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실제 오늘날에 와서는 논밭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농토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주택지로 바뀌었지만 지금의 주택지에 집이 들어서기 이전은 모두가 논밭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농반어(半農半漁)라 하여 어업에 종사하면서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어업에 종사한 곳이 오늘날의 수영구다. 물론 전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전어(全漁) 가호가 있고, 농사에만 종사하는 전농(全農) 가호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아서는 고기잡이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자급자족의 길을 열어간 반어반농이 옛 수영구 주민들 생업이었다. 그러한 일은 이곳에 농청놀이가 있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농청놀이는 농촌공동체로서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농촌의 두레행위를 극화(劇化)한 것이었다.
수영농청놀이는 집강(執綱 : 대표), 행수(行首 : 농사총감독), 집강(集講 : 농사계획 및 강의), 야장(野長 : 작업의 지도 감독) 등의 역할을 거쳐 두레행위로서도 조직적이며 규범적이었다. 그 당시는 오늘날의 수영구만이 아니라 남구까지 이에 속했을 것이지만 집단행위로서의 단결과 협동, 그리고 융화로 어울린 지난날의 유풍이 조선시대까지 어어온 것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