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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농청놀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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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농청놀이 소개

유래

수영농청놀이 소개 수영은 성이 축성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몰려와 거주하게 됨으로써 성 내외에 방대한 취락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성 안에는 산성머리, 동문안, 북문안, 남문안 등을 비롯한 6개 동이 있었는데 수군 관계자, 아전, 이속, 하인, 상인 등이 거주하였다. 성 밖은 구락리(현 망미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붕밖(북문 밖)과 범방우부락(현 광안리 일대)을 중심으로 한 남밖(남문 밖), 그리고 보리전부락(현 민락동 일대)을 중심으로 한 동밖(동문 밖)등 3개 취락 지역이 있었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바다와 면한 동문 밖의 주민들은 어업과 염업에, 남ㆍ북문 밖 쪽의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생업의 형태에 따라 좌수영 어방놀이, 수영농청 농요 등이 형성되었고, 수영야류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도시화되어 버렸지만 1945년 해방 당시만 해도 약 350호 1700여 명의 주민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수영은 조선조 이전부터 군사적 요새지로서 자연히 관에 의한 수탈, 아전ㆍ이속ㆍ토호들의 소작제에 의한 착취 등이 자행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넓은 농경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두레 형식의 협동조합격인 남ㆍ북농청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한편,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농청의 조직에 수군의 조직이 원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존속되어 오던 수영농청은 1966년 무렵 전체 720호 중 농가 호수가 178호로 줄어들고, 다시 1967년에는 130호로 격감되면서 이농과 도시화에 떠밀려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소멸의 위기에 놓인 수영농청 농요 및 놀이를 사단법인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를 중심으로 한 몇몇 뜻있는 분들의 노력에 의해 복원하게 되어 1972년 부산시 지방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수영야류의 소개


수영농청놀이 소개

조직과 제도

수영농청놀이 소개 수영농청은 원래 북밖 농청과 남밖 농청, 즉 남ㆍ북 농청이 각각 있었다. 각 농청에 소속된 농청원은 노동력이 있는 성인 남녀로 구성되는데, 집강(執綱), 행수(行首), 문서잡이, 집강(集講), 야장(野長), 영각수(令角手) 등 역원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집강(執綱)은 수장격으로 계열농청의 대표이며 행수는 농사의 총감독격으로 전체 작업을 관장하였다. 문서잡이는 서무, 회계, 기록 등을 맡았고, 집강(集講)은 농사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지도하는 일을 처리하였는데 이를 집강행수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야장은 수총각(首總角)이라고도 하여, 부분적인 작업을 관장 지도하는 직책으로 들일의 책임자였으며, 영각수는 일명 ‘땡깔이’라고도 하는데 영각을 불어 집합하게 하거나 작업을 지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각 농청 산하에는 내방청(內房廳)과 모기청(模技廳)을 두었다. 내방청은 성인 여자로 구성되며 행수, 집강(執綱), 야장 등의 역원을 두었다. 모기청은 15ㆍ6세 내외의 미성년 남자로 조직되며 농청원이 되기 위해 훈련을 하는 집단에 해당하므로 그 조직은 농청과 꼭 같았다.

그런데, 모기청에 소속되어 있던 총각이 농청원이 되기 위해서 ‘손두듬’이라는 일종의 시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제도가 있었다. 즉, 남아의 나이 16세쯤이 되면 그의 아버지가 역원들에게 주효로써 대접을 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야 농청에 가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신참으로 가입한 농청원은 어른들이 논을 매기 위해 준비를 하며 잠시 쉬고 있는 여가에 먼저 들어가서 논을 조금 매어 두어야 했다. 이것을 ‘앞 매 준다’고 하는데 신참자가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한가를 시험해 보는 과정이라고 한다. 만일 신참자의 보호자가 역원들에게 대접을 소홀히 했을 경우에는 이 일을 고되게 시켜 혼을 내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손두듬을 거쳐 농청에 가입된 사람은 이후부터 다른 농청원들과 꼭 같은 장정으로서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남자로 구성된 각 농청원들은 풀베기, 논갈이, 볍씨 뿌리기, 모춤 나르기, 보리타작, 논 매기 등 전문성과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일을 하였으며, 여자로 구성된 내방청원들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되, 모심기철에는 모찌기, 모심기, 기타 잔일 등에도 동원되었다. 이와 같이 노동력이 있는 남녀라면 누구든지 참여했던 집단이었으므로 이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엄격한 규율을 준수할 필요가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규율을 어기는 자에게 곤장을 쳐서 징치하거나 추방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고 하니 그 규범이 얼마나 엄격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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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및 가치성

수영농청놀이 소개 전통사회에서 농촌이었던 지역이 도시화되고 현대화됨에 따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었던 농사는 자연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수영 농청놀이를 재현함으로써 풀베기, 논갈기, 볍씨 뿌리기, 모찌기, 모춤 나르기, 보리타작, 논메기 등을 현장에서 처럼 볼 수 있게 되었고, 여자들도 이에 참여하여 모찌기, 모심기를 거드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보리타작 하는 모습도 보여 주고, 그리고 농사에 쓰이는 각종 농기구, 이를테면 쟁기, 써레, 가래를 비롯한 지게, 호미, 삽, 갈퀴, 도리깨, 풍석, 고무래와 비올 때 입는 짚으로 만든 우장, 잡사리와 같은 잊혀져가는 농기구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수영농청놀이의 특징이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농경의 풍속이 변천함에 따라 재래의 민요는 거의 인멸되고 있고, 농촌이 도시화함에 따라 오랜 세월동안 지탱되어 오던 농촌공동체의 붕괴와 더불어 민요는 물론, 농경의 풍속마저 급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완전히 도시화된 수영의 한 복판에서 영농의 전 과정과 농청 농요가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놀이는 수영 지역의 남녀 농부들이 예전의 농사짓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그 당시의 협업던체였던 농청이란 기구의 구성과 농청 조직원들의 역할 담당을 그대로 재현시킴으로써 귀중한 우리의 농경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시킨 점도 의의가 있다.

우리 것이라면 무조건 폄하하고, 무가치한 것으로만 여기는 이상한 사조가 팽배한 현실을 주고 보더라도 농요를 발굴하여 보존,계승한다는 것은 민족문화 전승에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수영농청놀이의 발굴과 전승은 농사에 관한 민속적 유산의 계승이며, 농요는 농청 조직원들이 고된 작업 때에 부르던 땀의 표현이니만치 이러한 민요의 가사와 곡을 후세에 전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이 놀이는 지역의 주민인 태말준, 정대윤, 태덕수 제씨 등이 옛 농청에서 일하는 것을 직접 보아 왔기에 그 모습을 그대로 생생하게 발굴할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한 가치성이 인정되어 1972년 2월 18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 수영농청놀이로 지정을 받게 된 것이다.

면적 10㎢ 에 불과한 오늘날의 수영구에 농토가 얼마나 있었겠느냐고 묻는다면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실제 오늘날에 와서는 논밭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농토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주택지로 바뀌었지만 지금의 주택지에 집이 들어서기 이전은 모두가 논밭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농반어(半農半漁)라 하여 어업에 종사하면서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어업에 종사한 곳이 오늘날의 수영구다. 물론 전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전어(全漁) 가호가 있고, 농사에만 종사하는 전농(全農) 가호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아서는 고기잡이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자급자족의 길을 열어간 반어반농이 옛 수영구 주민들 생업이었다. 그러한 일은 이곳에 농청놀이가 있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농청놀이는 농촌공동체로서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농촌의 두레행위를 극화(劇化)한 것이었다.

수영농청놀이는 집강(執綱 : 대표), 행수(行首 : 농사총감독), 집강(集講 : 농사계획 및 강의), 야장(野長 : 작업의 지도 감독) 등의 역할을 거쳐 두레행위로서도 조직적이며 규범적이었다. 그 당시는 오늘날의 수영구만이 아니라 남구까지 이에 속했을 것이지만 집단행위로서의 단결과 협동, 그리고 융화로 어울린 지난날의 유풍이 조선시대까지 어어온 것을 보이고 있다.